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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골든에이지」: 죽음과 애도

전기과 팡팡이 2019. 7. 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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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애도에 관하여 비평적 에세이를 작성하였다.

책의 내용을 보자면 공상과학적인, SF의 느낌만 살짝 냈다.

하지만, SF와는 전혀 다르게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바로 세월호 사건에 관한 내용을 소설로 풀어냈다.

 


 다 읽고 난 뒤에 김희선 작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는지 알기 위해 인터뷰를 찾아봤다.

 

 “2018 서울국제작가축제에<골든 에이지>라는 단편을 출품했는데요.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2014년 4월 16일, 바로 그 날이에요.”
 “너무 거대한 슬픔은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에 있어서 가장 표현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순간이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요.”

 

 김희선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 SF 요소들을 넣었고, 이 작품 또한 SF 요소가 가미된 단편 소설이다. 작가의 인터뷰 내용처럼 거대한 슬픔을 표현하기 어렵다라는 것을 ‘죽음’을 통해서 표현했고 여기에 SF 요소가 가미되어 더욱 결말이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이야기의 초반부에는 늙은 열쇠 수리공이라는 노인이 등장한다. 책의 제목과 노인이라는 두 단어를 조합했을 때 단순히 ‘노인에게도 젊은 시절 이러저러한 황금기가 있었다.‘ 라는 내용이라 추측했었다. 그러나 노인은 주요한 인물일 뿐 스토리의 전부가 아니었다. 노인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계기, 죽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죽음이라는 결과 속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등장인물인 물리학자의 말 중,

 

 “만약 가능하다면, 자넨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자네의 골든 에이지, 그게 언제냔 말일세.”
 “어쨌든 그가 선택한 골든 에이지는 바로 저 시공간이니까. 보이나? 저 미소. 그래...... 대체 그 어느 누가 저 노인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응?”

 

 책 속의 ‘나’가 아닌 독자인 나에게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대목이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구성된 내용이 아닌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 특정 사건과 그 사건에서 파생되는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짜여진 것이다. 책의 내용에서도 실제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제시했다.

 

 “그날, 그러니까 2014년 4월 15일 이후로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어. 배와 함께 깊고 깊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지. 그래, 그 많은 아이들, 그 사람들 모두 다.”

 

 이것을 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2014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말에 가까워져서 언급되었다. 그 전까지는 노인이 한 물리학자의 이론을 믿고 자신의 골든에이지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만 보인다. 본인의 리즈시절이 그립고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책에선 노인의 외로움이나 홀대,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한 묘사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노인이 선택한 죽음의 과정과 결과는 계기가 없어 보였고 선택한 방법 또한 기괴했기 때문에 언제나 마지막엔 반전과 큰 한방이 있는 추리소설처럼 읽혔었다. 그래서 마지막을 보기까지 결말이 그런 무거운 내용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결말에서 세월호 참사가 언급되자 이것이 이 작품의 중심적인 내용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책의 내용은 참사에 대한 것이 아닌 그 주변인의 고통을 중점적으로 전개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라는 단 한마디로 소설의 서사성을 무시하고 내용을 꽉 채울 정도의 충격적인 재난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하였다.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주변 사람들은 애도를 표한다. 사회적 재난으로 인한 죽음에 사람들은 모금운동, 집회 등을 통해 애도를 했다. 애도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다 보니 모금운동, 집회 등이 애도의 최선인가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으로 충분한 것인가라는 생각이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떠올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애도의 방식은 다르다. 내 주변에서 있었던 일을 예로 들자면, 20살이 되던 해에 중학교 동창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서도 그 친구의 SNS에 글을 남기곤 했다. 이것 또한 애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2살 때에는 친한 누나의 친동생도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당시에 나는 군복무 중에 있어서 장례식에 가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연락을 해서 동생의 명복을 빌어주고 다독여주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들 때라 생각했고 괜히 더 무겁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 따로 연락은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애도를 했다. 무엇이 최선이고 어떻게 하면 충분할 것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애도의 방식보다는 목적을 생각했어야 했다. 어떻게 애도를 할 것이냐가 아니라 애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최선이고 충분한 것이라 생각한다.

 노인의 죽음과 그 과정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게 화가와 물리학자였다. 화가는 “그는 죽기 전에 그 모든 걸 계획했고, 말도 안 된다고 끝까지 거절하던 나에게 거의 매일 찾아와 간절하게 졸랐어요. 제발 자기 자신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달라고.”, 물리학자는 “하지만 그의 눈을 보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라고 말하며 노인의 부탁을 승낙했다. 소설에 몰입하여 읽을 때는 못 느꼈지만 다시 돌아보며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니 화가와 물리학자의 대응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나올 수 없는 태도라고 생각이 들었다. 간곡한 부탁과 눈빛만으로 자살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승낙한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안됐다. 그래서 화가와 물리학자가 정상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단정적인 결론보다는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근거를 찾아 나섰다. 우편배달부 박씨의 화가에 대한 얘기와 물리학자가 ‘나’에게 한 말을 근거로 찾아 봤다.

 

“어느 날부턴 가버려진 폐가에 들어와 살던 놈에게 툭하면 배달되던 택배가 뭐였는지 알아? 그건 죽은 동물의 사체였어.  (중략)  동물의 고기와 피엔 생명의 정수가 들어있는데,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체를 갈아서 물감에 섞어 쓴다나 뭐라나.”
 “누구나 약간의 희생-물론 사람에 따라선 그게 ‘약간의’ 희생으로만 보이지는 않겠지. 어쨌거나 자기 자신의 살아 있는 입자를 얻으려면 이곳에서의 삶에 작별을 고하고 스스로 분쇄기에 걸어 들어가야 하는 거니까-만 무릅쓴다면, 자기만의 인공 우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화가는 동물이 아닌 사람을 재료로써 예술을 시도해보고 싶은, 물리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이행해보고 싶은 직업 특성상의 도전정신이 부탁을 받아들이는 계기였다고 결론지었다. 이 두 명의 등장인물의 행동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화가와 물리학자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화가와 물리학자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어떻든 간에 자살방조죄이다. 만약 노인의 부탁이 본인이 순리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게 된 후에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었다면, 화가와 물리학자의 행동은 죄가 아닌 애도의 한 방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들을 통해서 객관적 판단을 한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가 가져온 큰 슬픔을 알기 때문에 법과 체계를 배제시켜놓고 화가와 물리학자를 바라본다면 쉽게 비판하지 못할 것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서 애도를 하는 것이 최선이다.